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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진 문화칼럼] 불한당들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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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유진 작성일19-08-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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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서유진불한당들. 가장 적확한 단어이다. 불한당 놈들! 그는 놈이라는 말보다 더 낯 뜨거운 욕설을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벌겋게 충혈된 뉴스, 곳곳에 뻔뻔하게 쳐든 얼굴들. T, A, S, K. 이니셜 첫째 글자를 생각하면 누구인 줄 알리라. 그는 놈들의 얼굴에 짐승의 가면을 씌워 몽둥이로 얼굴이 짓이겨지도록 잔혹하게 패주고 싶었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다.

  그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를 불러내는 환상에 젖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안중근 의사가 떠오르자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높이 치솟는 것 같았다. 독수리가 되어 창공을 가로질러 그들의 눈을 쪼는 환영 앞에 몸을 떨었다. 이젤 위에 펼쳐놓은 말간 캔버스를 노려보며 T, A, S, K에게 씌울 짐승의 가면을 상상하는데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그는 뛰쳐나갔다. 그가 거두는 흰둥이가 거대한 몸피의 이웃집 검정고양이에게 물어뜯기고 있었다. 창백한 정원등 불빛을 받은 배롱나무가 핏빛으로 물든 것 같았다. 나무 아래 마련해준 흰둥이 집의 앞면이 뚫려 있어, 흰둥이는 꼼짝없이 갇혀 검정고양이에게 물리며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흰 뱃가죽에 대비된 새까만 등은 사악한 괴물을 연상시켰다. 그는 거미줄을 걷으려고 현관 계단 옆에 비치해 놓은 긴 막대기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 검은 놈의 등을 후려쳤다. 놈이 순식간에 담 위로 뛰어올랐다. 그도 막대기를 집어던졌다. 꼬리를 맞은 놈이 비웃듯이 야옹! 하곤 사라졌다.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이를 갈았다. 흰둥이를 현관에 데려놓고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온 그는 다시 T, A, S, K의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A란 놈 얼굴에 이웃집 고양이 놈 가면이 씌워지는 게 아닌가. 그는 머리를 흔들며 치를 떨었다. 아까 그놈의 고양이를 잡아 잔인하게 죽이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다. 그때 생각난 것이 보르헤스의 전집 1권,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나오는 불한당의 잔인한 행위였다. 온갖 불한당이 총동원되는데 그는 왜 그런 놈들의 몸서리치는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모아놓았는지 알 듯했다.

  잔혹한 구세주, 황당무계한 사기꾼, 부정한 상인, 냉혹한 살인자, 무례한 예절 선생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그중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의 행동이 떠올라 구역질을 했다. 모렐은 말을 뺏으려고 남자에게 리볼버를 겨누고 개울로 몰아넣었다. 남자가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시간이 없다고 하며, 무릎 꿇은 남자의 목덜미에 총알 한 방을 먹였다. 칼로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냈고, 남자를 개울에 처넣었다. 흑인을 이용하고 괴롭힌 모렐은 흑인들의 군대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모렐은 버클리라는 가명으로 병원에서 1835년 1월 2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2일과 4일, 노예들이 반란을 시도했지만 진압되었다.

  그는 공허했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에 증오감이 일었다. 2019년 8월 27일 밤 2시,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의 T, A, S, K에 얽힌 상념이 현세기의 식민 약탈로 비약되어 소리치고, 부수고, 무언가를 짓이기고 싶은 히스테리 증상이 나타났다. 참을 수 없는 복수심이 이글거리자 아까 흰둥이를 물어뜯는 그놈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지 못한 것이 원통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온갖 불한당들을 열거한 보르헤스는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라는 단편을 통해 유쾌한 메시지를 날린다.

  북쪽에서 온 새장수라 부르는 프란시스꼬 레알이라는 몸집이 장대한 사내가 패거리를 끌고 와, 이 마을에서 존경받는 칼잡이 로센도와 한 판 붙으려고, 그래서 죽이려고 나타났는데, 로센도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로센도의 애인 루하네라가 단도를 건네주며 싸우기를 권했지만, 로센도는 냇가로 향해 뚫린 창문으로 칼을 던져버렸다. 그러자 레알이 너 같은 놈에게는 칼을 쓰고 싶지 않다며 갈겨주려고 팔을 쳐들었는데, 루하네라가 레알을 껴안고는 겁쟁이 로센도를 놔두라고 한다. 레알이 그녀를 껴안고 밖으로 나간 후 로센도는 사라졌다. 얼마 후 루하네라와 레알이 들어왔는데 레알은 칼을 맞아 서서히 죽어갔다. 로센도가 아니면 누가 레알을 죽였겠느냐고 작중 화자가 말했다. 그들은 로센도의 단도가 날아갔던 긴 창문으로 레알의 시체를 던졌다. 급류가 시체를 싣고 가버렸다.
 
  그는 자신도 로센도가 되고 싶었다. 자신의 방식으로 로센도가 되어 흑인을 등 처먹는 잔혹한 모렐의 방식으로 복수를 하기로 했다. 그는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불한당들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고 냇가에 시체를 던지는 그림을 그려놓고는 커피를 타 아주 달게 마셨다. 그리고는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나님이시여, 그들의 총구를 자기들에게 겨누게 하시고, 저희끼리 서로 피 터지게 싸우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소서.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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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